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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희망을



이 단 경/수필가


영어회화를 배우러 문화센터를 다닌다. ‘학교 다닐 때 제대로 했더라면하는 아쉬움을 느꼈다. 제때 공부 안 하다 뒤늦게 하느라 열 배는 더 힘들다. 단어도 외워지지 않아 방금 찾은 단어를 또 찾는다. 아는 어휘조차도 확신이 서지 않고 가물가물하다. 친구들과 대화 나누다 보면 심지어 모국어도 생각이 안 나건만 영어를 배운다고 난리다.


간간이 가는 해외여행 때문에라도 잘하고 싶다. 체력도 언어도 달려 감히 자유여행을 꿈도 못 꾸건만 늘 마음속엔 간절하다. 영화에 나온 한 장면처럼 해변에 있는 멋진 찻집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싶다. 또 관광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주변을 여유 있게 돌아보고 싶기도 하고 상점에서 작은 기념품을 살 때 편안한 마음으로 물어보면서 고르고 싶다

 

마치 유치원 아이들처럼 한 줄로 죽 따라다니며 가이드를 놓칠까봐 허겁지겁 다니는 게 이젠 싫다. 패키지여행이나 자유여행이 서로 장단점이 있지만, 가끔 한가롭게 여행을 하고 싶어서라도 영어회화를 잘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두 개 언어를 하는 사람을 보면 멋있어 보인다. 부럽기도 하고.

언젠가 나도 잘 할 날이 오겠지하는 기대를 갖고 시작했다. 그렇다고 아주 열심히 하진 않고 눈길에 찍힌 발자국마냥 한발 한발 내 딛는다.


억지로 하는 공부가 아닌 만큼 재미는 있다. 그에 반해 실력은 거의 걸음마 정도다. 성격자체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해 더욱 늘지 않는 것 같다. 가끔 얼마큼 알아듣나 테스트 할 겸 미국영화나 영국영화를 보곤 한다. 배우가 하는 말이 좀 들리면 어둠속에서 작은 빛이 보이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진다. 많이 못 알아들으면 잠시나마 실망스럽다.


오늘도 유투브를 뒤적이다가 1937년에 제작된 영화 알프스소녀 하이디를 봤다. 어릴 때 책을 읽었지만 김이 서린 안경처럼 기억이 희미했다. 그 당시 유명했던 아역배우 셜리 탬플이 주연을 했다. 아이의 선명한 발음도 좋고 내용이 복잡하지 않아 영어 듣기 공부에 도움이 될 것 같다

 

부모를 잃은 여덟 살 하이디는 이모에 의해 부잣집 외동딸 클라라의 놀이상대로 팔려간다. 어린 주인공은 오로지 알프스에 계신 할아버지한테 가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한다. 못 된 어른한테 이용을 당해도 전혀 낙담하지 않고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모습이 아주 의젓하고 대견하다

 

다쳐서 걷지 못하고 휠체어에 앉아있는 클라라에게 여섯 살이나 적은 하이디는 알프스에 사는 친구가 자기한테 글을 못 배울 것이라고 했지만, 자기는 결국 해냈다고 하면서 용기를 준다. 걷는 것을 거의 포기하다시피 한 클라라에게 걸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하면서 매일 조금씩 연습을 시킨다. 드디어 크리스마스 날! 클라라는 몇 발자국 걸어서 아빠 품에 안긴다. 아는 동화라 기대를 안했는데 가슴이 뭉클했다. 오랜 세월 계속 이어져 내려온 고전은 가뭄에 단비를 맞은 것처럼 마음을 촉촉하게 한다. 어릴 때뿐만 아니라 반백이 넘은 지금 봐도 여전히 감동한다.


어린 하이디는 나에게도 용기를 준다. 언젠가는 영어회화를 잘 할 수 있겠지. 끈을 놓지 않고 꾸준하게 공부를 하면, 극장에서 외화 볼 때 자막에 신경 쓰지 않고 감상 할 수 있고 여행가서도 조금은 자신 있게 행동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나의 행동이나 말이 누군가에게 희망을 갖게 한 경우 있는가? 영화가 끝나자 자신에게 물었다. 누가 답답하고 힘들어서 나를 필요로 할 때 귀찮아 한 적은 얼마나 많았을까?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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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9-08-19 07:3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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